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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철학

☯ 無我 (무아)란 무엇인가

by 용 담 2024. 11. 27.

無我 (무아)란 무엇인가

일체개고(一切皆苦)는 모든 것이 고다. ()()의 일종이다.

고의 반대는 마음의 평화~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평화 고요함

()는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상황을

총칭하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명제이다.

싯달타의출가 선정고행사색연기.

禪定(선정)싯달타에게 영원한 벗어남을 제공하지 못했다.

苦行(고행)초월주의와 금욕주의는 상통하는데 이는 다 이원론적 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어 고()를 가중시킨다.

영 육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 항구적인 아트만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고()의 근원이다.

思索(사색)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 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을 깊게 깊게 사색한 것이다.

緣起연기(의존하여)+(같이)+(일어난다.)~긴 것과 짧은 것은 같이 비교 될

때만 생겨나는 개념이다.

역사적 붓다는 정확하게 12연기를 설하지 않았다.

12연기는 다양한 연기관계를 설한 파편들이 후대에 종합되어 성립된 것이며

그것이 아쇼카3차 결집 이후의 사건이 분명하다.

고익진(1934~1988) 전남광주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평생을 정진하다 교수로서 생애를 마쳤다.

(아암법상의 체계성 연구) 고 익진 지음

(한국불교전집)의 위업은 그의 필생의 작업 이었다.

 

緣起(연기)~12처로부터 출발. 12처는 6내입 처. 6외입 처~

6내입 처: () ()() () () ()~이것: 6()감각주관

6외입 처: () () () () () ()~저것: 6()감각대상

십이()육육법五蘊(오온)십이緣起(연기)

연기의 모든 항목을 諸法 (제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기 속의 제법은 불변하는 자기(아트만)를 가질 수 없다

(無我 무아)諸法無我(제법무아)는 연기론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中論(중론)~2세기경 인도의 대사상가 용수에의 하여 지어진

중관학 의 대표적 저작. 동국대 김 성철 교수의 번역이 있다.~

(거자즉불거,불거자불거,리거불거자,무제삼거자)

~ 去者則不去 (거자즉불거)~가는 놈인즉 가지 않는다

~(가는 작용(술부)을 떠난

가는 놈(주어)이 따로 있어서 그 가는 놈이 가는 것은 아니다.)

不去者不去 (불거자불거)~(가지 않는 놈은 가지 않는다.)

離去不去者 (리거불거자)~無第三去者 (무제삼거자)~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제3의 가는 놈은 없다.)

가는 놈이 간 다는 동어반복의 오류를 법하고 있다.

가는 놈(주부)과 감(술부)을 분리하는 동시에 이런 오류에 빠진다.

가지 않는 놈이 간 다는 모순의 오류이다.

언어라는 거울(=사유체계)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는 五蘊(오온)假合(가합)이다. 61013승 계의 가합이다.

그것은 나가 아니다~ (무아) (싯달타)

(내가 산다)~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나의 인생 밖에 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싯달타는 우리의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것이다.

同體大悲 (동체대비)~너와나 주관과 객관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大慈大悲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무아론은 모든 실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 적이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 불교의 본체론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실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은 곧 현상론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천여 년 동안 서양철학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해결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난 19세기후반부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불교의 동면 이었다.

안티노미 (이율배반) 서로모순 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

싯달타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컸다.

이것이 원시불교의 소박함이다.

 

無記 (무기)~기술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는 뜻.

형이상학적 명제는 無記 (무기)의 대상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절대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해탈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1222~3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적 오소가 다 들어있다.

春城(춘성)스님의 일화는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시대의 공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때만이 의미 있는 것이다.

무아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해체 이다.

불교는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형이상학은 결국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무의미성이 드러난 20세기에나 불교는 이해되기 시작했다.

비록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논쟁의 입장으로 삼을 때

그 진리는 집착에 의해 더렵혀진다.

싯달타는 논쟁의 무익함에 대하여 아성적인 자제력을 호소했다.

연기론은~순관역관사성제팔정도삼학무아무기.

 

무아에서 유식으로

도선사 우이동 삼각산 중턱에 있는 조계종 대찰

靑潭(청담)스님 (1902~1971) 본명은 李淳浩(이순오)경남진주사람

25세에 옥천사에서 朴漢永 (박한영)을 은사로 득도.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불교의 사회화와 타종교와의 대화에 헌신.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삶을 살았다.

청담스님 일화~죽은 송장에게도 몇 시간씩 시달음(염불)을 하는데.

졸지만 산사람인데 얼마든지 할 수 있구 말구!

慧能(혜능638~713)~중국선종의 제6. 남종頓敎(돈교)의 개창자.

속성은 노(). 新州(광동성)태생.

神秀 (신수)를 제키고 5弘忍(홍인)에게서 依法(의법)을 전수.

광동성에서 대세를 폈다.

 

도올 강의에서』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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