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王이냐 臣이냐
☞군자는 홀로 있을 때 반성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중용)
☞사림(士林) 현실적 권력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전통을 지키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선의 선비
☞선비(士)란 그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성 을 구현하는 것으로만 당당히
살아가는 자이다. (맹자)
♣존천리거인욕 (存天理去人慾) ⎯주자학의 제1명제⎯
☞전통유학은 사회철학이 빈곤하다고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원적인 해결책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이것이 오히려 유학의 생명력이다.
☞공주우금치(牛金峙)전투 1894년 11월초 일본군의 신식장비 앞에
동학 10만 대군이 500명만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격전 갑오동학혁명 실제적 종료.
☞정도전은 신권(臣權)정치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치형태.
☞이방원(李芳遠)은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화신 이었다.
이방원은 민무구, 무질, 무훌, 무희 4명의 처남을 다 죽였다.
사돈 심온은 세종 즉위초 영의정이었으나 권세를 부리자 가차없이 사사 되었다.
☞성군세종의 등장은 오로지 이방원의 피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세종, 세조 때의 명신들은 대부분 정도전을 신봉한 권근(權近)밑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세종, 세조 때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틀대로 갔다.
☞세종과 정조는 고도의 학식을 소유한 성군이었지만 신권에 다시 눌려 당대의
영화스러운 모습을 계승시키는데는 실패한다.
만개하고 스러지는 꽃과도 같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시소게임이다. (도올)
☞문종(세종의 맏아들 )은 세종치세기간 중 8년동안 섭정을 하면서 과로하였다.
등극한 후 병약하여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단종 때 정치권력은 김종서, 황보인에게 집중된다.
그러면서 또다시 신권(臣權)이 강화된다.
☞조선왕조를 단순한 왕권의 역사로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정도전이 왕권을 제약한 이래로 왕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 속에 묶여 있었다.
☞세조는 단종 를 빙자해서 신권을 제압한다. 세조의 아들은 모두 병약했다.
☞예종은 등극한 후 1년 2개월 만에 죽는다.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업보라고 생각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성종 주변에는 그를 압박하는 권신들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신진사림(士林)들이 많이 진출할 수 있었다.
☞성종(1469~1494, 25년간 재위)의 치세기간에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삼국사절요),(동문선)(오례의),(악학궤범)
이 모두 성종 때 편찬되었다.
☞성종은 영남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 1431~1492)등 젊은 문신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임사홍,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훈구파 세조의 찬위를 도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신집단. =훈구공신(勳舊功臣)
☞개혁세력도 기득권자가 되면 보수세력으로 전략한다. 훈구(勳舊)↔ 사림(士林)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경상도 밀양출신의 사림파 거두, 항우가 초(楚)의
의제(義帝)를 폐한 것을 단종에 사(死)에 비유. 단종을 조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
을 지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화(士禍)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의미 무오사화만 사초가 발단이었기 때문에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사화는 공신, 외척, 인척세력이 사림을 견제한 사건이다.
☞연상군은 치세초기에는 성종말기에 나타난 퇴폐적 풍조를 바로잡았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별시문과로 좋은 인재를 등용하고 여진족을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켰다. (국조보감)을 편찬해 제왕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연산군시대에 일어난 양대 사화가 무오사화(조의제문이 원인)와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사건이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선생인 김광필(金宏弼)도
사형 당했다.
☞사림을 쫒아 내려했던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갈아 버리고 중종을 세운다.
드라마(대장금) 속의 중종과 장금의 관계는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중종이
57세로 세상을 뜨기 직전에, 내의원들이 약제를 상의하고 있는데,
내 증세는 장금이 안다. 라고 전교하는 결정적 한 줄이 (중종실록)에 실여있다.
☞중종이 훈구파에 의해 또다시 갇이게 된다. 그러므로 사림의 대표적인물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 김굉필의 제자로 젊은 나이에 사림파 영수가 되어
발탁된다. 34세에 등용되어 대사헌에 이른다. (기묘사화로 38세에 죽음)
☞조광조는 우리나라를 요순삼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흥지치 (興至治)라 불렀다. 지극히 이상적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는 재미있다.
퇴계는 그를 극히 존숭하는 반면, 율곡은 공부가 덜된 상태에서 융통성 없는
도덕적 이상만 높고, 현실에 어두운 자로 평가했다.
☞소격서(昭格署) 궁정내 도교의 제식을 거행하던 관서,
고려 때부터 내려왔다. 우물에 비친 북두칠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1518년 조광조가 집요한 읍소 끝에 혁파시켰다.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을 도모한 공신들의 과장된 공훈을 없애버려야 한다.
74명이나 당했다.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당했다가 곧이어 사사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 를 남겼다.
☞나는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는 국가를 내집처럼 걱정했다.
☞조광조가 투옥되었을때 성균관 유생 1천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무죄를 호소하였다.
☞새로운 신진 사림의 상징 이였다. 후에 조선의 사림은 조광조의 영향을 받았다.
☞퇴계이황(李滉, 1501~1570)연산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산 조선중기의 대학자,
주자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정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유학은 이퇴계에 이르러 조선 사람들의 내면적
삶의 철학이 되었다.
☞1558년 10월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때 새로 급제한 기대승이 퇴계를 찾아뵈었다.
☞기대승(奇大升,1527~1572) 퇴계사대의 대학자.
1558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대사성까지 올랐다. 본관은 행주.
☞기황후(奇皇后) 기대승과 같은 행주 기씨의 여자인데 궁녀로 원나라에 가서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을 계기로 기씨는 고려에서도 세력기반을 얻었다.
☞이퇴계는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다.
평생 손아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추만(秋巒)정지운(鄭之雲,1509~1561)경기도 고양출신의 학자.
조광조 계열인 김정국(金正國)김안국(金安國)문하, 퇴계에게도 배워다.
그의 독창적 작품(천명도설)은 사칠논쟁의 발단이 됨.
사단발어리 (事端發於理) 칠정발어기 (七情發於氣)
☞퇴계는 사단, 리지발; 칠정, 기지발. (四湍, 理之發; 七情, 氣之發)
♣기(氣)⟶ 칠정(七情) 기가 발한것 理⟶ 사단(四端) 리가 발한것
☞전통적 주자학에서는 리(理)는 순선(純善)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 이념일 뿐
구체적 작위(作意)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발(理發)은 주자학에서도 이단적인 생각이다.(주자어류)에도 리발 이라는
말은 있으나 퇴계의 주장과는 어감이 다르다.
☞맹자가 측은지심, 인지단야 (側隱之心, 仁之端也)
☞사단: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側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단(端) 본체가 드러난 하나의 단서, 실마리.
☞단(端)은 성(性)이 아리라 심(心)이다.
☞단(端) = 측은지심(惻隱之心) = 정(情) ≠ 성(性)
☞비칠정지외복유상단야 (非七情之外復有四端也)칠정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봉의 편지)
☞사단, 내칠정중 발이중절자 지묘맥야 (乃七情中 發而中節者 之苗脈也)
☞사단(四端)은 사덕(四德)이 아니다.
☞부사단정야, 칠정역정야, 균시정야 (夫四端情也, 七情亦情也, 均是情也) (퇴계의 편지)
☞소종래(所從來): 그 감정의 근원을 캐어들어 간다면....
⦋ 정(情) ⦌
사단(四端) 칠정(七情)
⟱ ⦋소종래 (所從來)⦌ ⟱
본연지성 기질지성
⟱ ⟱
리(理) 기(氣)
☞소수서원(紹修書院)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
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명종으로부터 편액을 받음.
하바드대학 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율곡의 철학은 퇴계와는 계통이 다르다.
율곡은 고봉 기대승의 논리를 계승 하였다.
율곡은 리발(理發)을 인정치 않는다. 기발(氣發)만을 인정한다.
리발(理發)= 이상주의적 인간관 기발(氣發)= 현실주의적 인간관
☞율곡사상을 이어서 송시열(宋時烈, 1607~1687) 호는 우암.
조선후기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는 기사환국때 죽음.
☞조선후기에 오면 주기계열의 학풍이 퇴계적으로 리화(理化)되는 현상이 생긴다.
그러면서 성리학은 생명력을 잃고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구한말에 오면서 현실 대처능력을 일어 조선왕조의 멸망에 이른다.
☞조선의 성리학은 반드시 인류보편의 사상적 흐름속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도올강의 에서』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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