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저녁이 아름다운 집 夕佳軒
  • 용담 龍潭 의 맑은 물은 이 안이 龍安處
  • 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느낀다.
좋은 글

전 재산 줄테니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며 울던 회장님

by 용 담 2012. 3. 14.



 

★ 전 재산 줄테니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며 울던 회장님 ★

대부분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라고 한다. 예전에 한 기자가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다큐멘터리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가 왔다”고 간수가 호출해 문을 나서면 얼마 안 가서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고 한다. 갈라지는 길의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면회소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일단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는지라 간수가 왼쪽으로 밀어 붙이면 그 나무를 붙잡고 늘어져서 나무의 가운데가 손자국으로 닳아 있을 정도 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임박한 죽음을 잠시나마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인지 모른다. 병원에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다.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 오랜 기간 몸부림치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 등…. 오래 전 한 의사가 불치의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 분은 암이라고 설명을 해도 믿지를 않았다. 따라서 항암제를 머리맡에 놓아 둬도 임박한 죽음을 믿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사람은 ‘나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수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보면서 욕심없이, 화내지 말고 살자고 결심했는데, 어느덧 또 욕심-화를 내니…】 어느 누구나 반드시 맞이하는 죽음…. 언제가 됐던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들 있지만 대부분이 자신은 아니라고 믿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욕망, 욕심, 갈등 등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도 모른다. 또한 황혼기를 훌쩍 넘어선 사람들도 권력과 돈에 눈이 멀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육체를 교도소에서 보내는 이야기도 우리 주위에서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모 재벌의 회장. 어린 시절 나의 초등학교 동창의 형으로 동네도 같았다. 중년이 돼서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취임해 나와는 거의 마주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50대 초반에 뇌종양(암)으로 모 대학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뒤 내게 연락을 했다. 우리 병원의 암센터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상태가 심했으므로 입원을 해 투약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항암제 치료는 매우 힘든 과정이다. 어떤 환자는 “폭탄을 맞는 기분” “땅 속으로 꺼지는 기분”이라고 하는가 하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표현하기까지도 한다. 입원한 지 1개월쯤 지났을 때 회장이 나를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미 체중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처음 보면 누군지 못 알아볼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나의 이름을 불렀다. “준희야. 내가 너한테 부탁이 있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내 병을 좀 낫게 해줄 곳이 없겠냐? 여기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젓는 것 같은데 단 0.1%라도, 아니 실험 대상으로라도 치료 받을 곳이 없냐? 너는 내게 진심으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처절함이 묻어 있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쳐다보면서 “내 모든 재산 다 줄 테니까 산이나 강가에서 한 3년 만이라도 살게 해 줄 수는 없겠니?”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네 (중략)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중략)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강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어느 신사가 쓴 글귀가 생각난다. 나는 방을 나서면서 이제부터는 지금의 나를 행복하다고 여기고 욕심, 성냄 등을 버리고 착하게 살자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사소한 일로 격하게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봤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CNB저널에서 -]

★ 진정한 축복은 죽음이란 영원한 잠에 들어갔을 때

화물을 가득 실은 두 척의 배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 중 한 척은 이제 막 출항 차비를 하고 있었고, 또 한척은 항구에 입항한 상태였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가 출항할 때는 떠들석하게 환송을 하지만, 반대로 배가 입항할 때는 환송 때와는 달리 별다른 환영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탈무드]에서는 이러한 것을 대단히 그릇된 습관으로 지적하고 있다. 출항한 배의 앞날은 풍랑을 만나 어떤 고난을 당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떠들석하게 환송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오랜 항해의 길을 끝내고 무사히 귀항한 배한테는 진정으로 기쁘게 영접해 주어야 한다. 이 배야말로 어려운 역경을 뚫고 맡은 바 책임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많은 축복을 보낸다. 이 아이야말로 앞으로 어떠한 고난의 길을 걸어갈지 , 도중에 그만 죽을지, 아니면 흉포한 살인범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제 막 항해를 떠난 한 척의 배와는 같은 아기에게 축복을 보내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축복은 사람이 죽음이란 영원한 잠에 들어갔을 때 보내야 한다. 그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많이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이 때에야말로 진정한 축복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 죽음에 대한 莊子의 생각

죽음에 대한 莊子의 생각 : 곡(哭)대신 노래를 부르다 장자의 부인(婦人)이 죽었을 때, 친구인 惠子가 문상(問喪)을 와 보니, 장자는 빗대어 기대앉아 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기에 惠子가 말하기를: 자네는 부인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자식을 낳아 같이 길렀는데, 울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어찌 분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른단 말인가, 좀 심하지 않은가?”하고 나무랐다. 이에 장자가 대답하기를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잘 생각해 보게나 인간(人間)이란 애당초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지 않았네. 생명은 고사하고 형체(形體)도 없었고, 기운(氣運)조차 없었네. 그저 망막하고 혼돈(混沌)한 대도(大道)속에 섞여 있던 것이 변해서 기운을 낳고, 기운(氣運)이 변해서 형체(形體)가 생기고, 형체가 변해서 생명(生命)이 되었네. 그리고 그것이 변해서 다시 죽어서 간 것일 뿐이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란 사계절(四季節)의 순환(循環)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모처럼 하늘과 땅을 침실(寢室) 삼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참된 모습 옆에서 소리 내어 운다는 것은, 천명(天命)을 분간하지 못하는 천박(淺薄)한 짓으로 생각되었기에 우는 것을 그만 둔 것일세. 이에 惠子는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자(莊子)는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연결된 순환(循環)으로 본다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는 기(氣)의 모임과 분산(分散)의 차이 일뿐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임하여 너무 슬퍼하지 말며, 삶에 대하여도 지나치게 집착(執着)하지 말라. 장자 철학(哲學)에서는 삶과 죽음의 화해(和解)가 이루어진다. 장자(莊子)와 제자(弟子)들의 대화 장자의 죽음에 임하여 제자(弟子)들이 장사(葬事)를 후하게 치르려고 계획했으나 장자는 만류하였다.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별들을 구슬장식으로 하며, 만물을 부자라 생각한다면 내 장례식(葬禮式)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렇지만 아무렇게 장사를 지내면 까마귀와 솔개가 사부(師父)님의 유해(遺骸)를 먹을까 걱정입니다. “물론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겠지. 그러나 땅 밑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의 밥이 되지 않겠느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