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초기 환국한 이승만박사의 부인으로 함께 귀국할때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파란눈의 서구여성 프란체스카의 한복차림이 너무신기했든 그때가...
하와이 망명생활후 홀로 다시 남편의나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여사
그가 펼처낸 6.25 한국전쟁이 터진 그날의 긴박한 대통령의
하루 하루의 기록입니다.
조금 길긴하지만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어서 옮겨 드립니다.
자료주신분 감사합니다.
올해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1년을 맞는다. 이 책의 원본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6.25 기간 중에 쓴 영문일기이다. 영문일기는 비망록(Confidential Notes) 또는 프란체스카 일기(Mrs Rhee Diary)로 통용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날인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이후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재반격을 시작하는 1951년 2월 15일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가위난의 전시(戰時)에 대통령과 경무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국내외의 중요한 사건과 전쟁상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비망록은 ‘대통령의 경무대 일지’나 다름없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戰時統治史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이라는 특수한 전시 상황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그 능력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이승만 대통령의
입의 혀처럼 일처리를 잘해 나갔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이틀 간 계속됐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기록한 ‘우리의 전쟁’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전쟁비망록은 6.25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자료다. 특히 6.25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인천상륙작전ㆍ중공군개입), 가장 어렵고(서울철수ㆍ낙동강방어), 가장 혼란한 시기(부산 피난ㆍ1.4후퇴)에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관계, 한미관계, 군사문제, 전선 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난 우리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입장을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전쟁의 핵심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자료는 그 가치를 더욱 신뢰받을 수 있을 것이다.
30년 전 발표되어 책으로는 첫 출간
전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일기체 형식의 6.25전쟁 비망록은 프란체스카 여사에 의해 휴전이후 50년 뒤인 1983년 지상에 뒤늦게 공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지 약 1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5년 이승만 대통령 사후(死後) 오스트리아 친정집에서 있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1983년 6월 24일부터 중앙일보에 비망록을 바탕으로 ‘6.25와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했다. 113회에 걸쳐 연재된 글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등 그때까지 몰랐던 6.25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소개됨으로써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 6.25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의 글을 다시 정리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다.
책에서 발췌한 주요 부분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6월25일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국방부 전사에는 새벽 4시로 기록,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해 5시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나갔다. 10시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 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라며 입속말을 했고, 순간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한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대통령과 나는 군인들을 꼭 우리 아이들(Our boys)이라고 불렀다―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 땅도 되찾겠지.”라며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 정보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동경서 날아 온 맥아더 장군을 반갑게 맞는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깨워!...당장 이 나라를 구하시오" 26일 새벽3시
대통령이 도쿄(東京)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훈련을 받고나서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를 불렀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계속 떨고 있었다.
군부지도자들은 2, 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젠장, 비행기가 없으니 탱크를 막을 수가 있나?”대통령은 안절부절못하고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맴돌았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6월27일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대전 사수해, 난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7월1일 오전3시
대전의 어둠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황규면 비서가 대통령을 깨웠다.
공산군 탱크가 이미 수원을 지나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긴급 보고였다.
보고를 받고 난지 20분쯤 뒤, 미 대사관 1등서기관 해럴드 노블이 관저로 달려와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신 국방장관과 정일권 장군도 이내 도착했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는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 없이 죽는 게 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
지사 관저서 피난살이, 70명 대식구 끼니 걱정 7월22일
피난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다가온다. 이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하는 사람은 조 지사부인이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 대통령 임시관저에는 항상 70여 명의
고정된 식구가 북적거렸다.
이 모두가 조 지사 부인의 일거리다. 우리 부부, 각료, 국회의원 비서관, 경호경찰, 수시로 드나드는 군 장성, 미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 이곳에 내려온 정부관리들 모두가 조 지사 관저의 식객들이었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 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밥 짓는 일에서 빨래까지 그만한 중노동도 없었다.
피난길엔 너나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당시 지사관저에는 헬렌 김(=金活蘭)이나 임영신(任永信) 박사 같은 여류인사들도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각료들의 팬츠차림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땀띠약, 대통령이 몽땅 군인들에게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에 적셔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
진물까지 흘렀다.
나는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초 대사나 워커 장군, 그리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미국인들은 나를 보면 “마담 리,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은 일체 못하도록 나에게까지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워커 장군에게 땀띠약을 부탁한 것이다. 장군은 땀띠연고 외에도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를 한 박스 보내왔다.
그런데 내가 부엌일을 보러 잠시 들어간 사이에 약상자가 대통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대통령은 나에겐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아침보고를 하러 들어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며
약상자를 맡겨버렸다.
약상자뿐만 아니라 친정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합쳐 주어버린
것이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 신 장관이 막 약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말도 못한 채 땀띠연고 하나만 빼놓으라는 사인을
신 장관에게 보냈다. 장관은 알았다는 듯 슬쩍 한 개를 빼돌리려했다.
그때 뒷머리가 따갑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대통령이 무서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노려보고 서있었다. 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장관도 멀쑥한 표정으로 냉큼 나가버렸다.
평소에도 남에게 무엇을 줄 때는 나에게 물어보는 법이 없는 대통령
이었다. 그런 성격에 자신의 땀띠를 치료하겠다고 얻어온 약을 전선에
보내면서 내 의사를 물어볼 분이 아니었다.
학도병들에게 유엔군 군복, 영어 교육 8월14일
어제 오후 콜터 장군이 무초 대사, 드럼라이트 1등 서기관과 함께 찾아왔다. 콜터 장군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맥아더 사령관이 자신에게 “1천 명의 한국 병사들에게 유엔군 휘장이 있는 군복을 입히고, 미군과 함께 먹고 잘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지금까지는 한국군과 미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행동했더라도,
양 국군이 먹는 음식은 달랐다.)
콜터 장군은 사흘 이내에 3천 명의 한국인 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석했던 국방장관은 그 같은 목적을 위해선 18세 전후의 한국
학도병들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학도병들은 약간의 영어를 할 수도 있고, 또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이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재 매일 1천 명의 학도병이
징집되고 있는 터였다.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美대사 말에 권총 꺼내 "이 총으로 적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쏘겠소"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대통령 닮은 양씨 내리자 군악대 연주 8월20일
오후 7시, 우리는 헤스 소령, 노블 참사관, 김 장군, 김 대위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6월말 경무대를 떠나온 뒤 처음으로 나는 우리 집 부엌 같은 기분이 드는 진해별장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전처럼 양념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파, 풋고추, 감자를 듬뿍 넣고 그럴듯하게 닭찜을 흉내 내고, 상치로 겉절이를 만들어
식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요리를 만들 기회를 맞은 양 노인도 신이 났다. 대통령이 양 노인을 데리고 다니는 데는 꼭 요리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노인네 사이에 사연이 있어서였다.
나이는 대통령보다 몇 살 아래였다. 일찍이 자식 하나를 두고 상처한 뒤 자식마저 살림을 차리자 사고무친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은 늘 이 외로운 양씨를 감싸 돌았고, 서울서 피난 올 때도 가정부 대신 양 노인을 데리고 왔다. 그는 얼굴 생김이나 풍채, 희끗희끗한 헤어스타일이 너무도
대통령을 닮았다.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대구 임시관저에 있을 때 두어 번 미8군에서 냉동고기류와 빵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또 시민들은 대통령이 들도록 감자,
옥수수, 계란, 닭 등을 지게에 지고와 두고 가기도 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이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날씨가 더워 고기나 빵 같은 것은 하루만 지나면
상하는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양 씨를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부산 훈련소에 다녀오지. 저 음식들을 갖고 가서 자네 솜씨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게.
음식이 빨리 상하니 비행기로 가지.”
부산 신병훈련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특식을 제공한다는 연락을
받고 군악대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양 씨가 음식을 먼저
챙기기 위해 트랩을 내려섰다.
군악대가 대통령 환영 연주를 시작했다. 언뜻 보아 양 씨는 틀림없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것은 양 씨였다. 그는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군악대는 대통령이 환영에 답하는 줄 알고 더 신이 나서
나팔을 불어댔다. 이 해프닝이 있고난 뒤 대통령은 양 씨를 보면 “자네는 음식 대통령 하게. 앞으로 내 시찰 때는 함께 가서 우리 아이들 음식을
만들어주지.”하며 꼭 수행토록 했다.
모든 문서를 손수 타이핑하는 이승만(미국 망명생활때부터 사용)
미군과 함께 상륙작전...목표는 목포 9월12일
아침에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3천 해병을 이끌고 정오에 배로 떠난다고 했다. 울산 쪽 동해안에 12척
의 큰 함정들이 대기 중이라는 것이다. 한 달 쯤 전 대구에서 일본으로
훈련 차 떠났던 8천 명의 한국군 장병들도 이번에 돌아와 미군과 함께
상륙작전을 벌이러 간다고 한다. 상륙지점은 목포라는 말도 있다.
저녁 무렵 대구에서 국방장관이 와 대통령에게 청도에 있는 피난민촌을
방문하도록 권했다. 대구와 부산 사이 중간쯤에 있는데 기차를 타고 3시간, 다시 지프로 45분 걸리는 곳이다. 신장관은 또 총공격이 계획됐으나 일본을 덮친 태풍 때문에 연기해야 될듯하다고 보고했다. 밤새 바람이 미친 듯 불어댔다. 도대체 어찌될 것인가. 바람 불거나 비 오는 날이면 공군기들이 적을 공격할 수가 없다.
맥아더 인천상륙 성공, 워커 장군은 몰라 9월16일
오전 9시를 기해 모든 전선에서 총공격이 시작됐다. 날씨가 또 궂다.
가신 줄 알았던 태풍이 다시 횡포를 부린다. 어제 하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공식발표나 보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SCAP(연합군최고사령부)
방송을 들어서 알뿐이다. 인천작전은 해군과 해병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워커 장군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로 지원 폭격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게 미 육군과 해군이 이곳에서 작전하는 방식이다.
서울 탈환 앞두고 첫 기자회견 9월23일
환도 선발대 김포로 떠나다 9월22일
노블 참사관이 아침 일찍 와서 서울시장과 인천시장이 환도 선발대로
김포로 떠난다고 알려줬다. 또 맥아더 장군이 어제 도쿄로 돌아갔다는
방송보도도 전했다.
그렇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전에는 서울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점심은 윌리엄 박사와 신성모 국방이 함께했다. 윌리엄 박사는 도지사
집에서 기거하지만 식사는 우리에게 와서 한다.
도지사는 지난 20일 윌리엄 박사를 환영하는 시민대회를 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사는 흐뭇해했다. 이 대회에서 대통령은
한 시간도 넘게 연설을 했다. 대통령은 신 국방장관에게 서울 중앙청만은 꼭 우리 국군이 먼저 탈환하여 태극기를 꽂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어제 대통령은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사변 이후 처음 회견을 가졌다.
서울탈환을 앞둔 소감을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처음에는 무기가 없어 곤란을 당했으나 이제
서울탈환을 목전에 두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언제나 민주진영은 끝에 가서 승리한다. 그동안 동포들이 화를 당하고,
더욱이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전재민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하루바삐 서울을 탈환하고 정부가 들어가면 앞으로 더욱
우리가 할 일이 많다.
드디어 서울 김포비행장에 내려 목이 메이다 9월29일 오전8시
우리는 부산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환송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대통령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조봉암 국회부의장과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도 함께 탔다. 한 시간 반 이상의 비행 후에 우리는 인천 앞바다에
줄지어있는 전함들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은 시종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여러 군데가
파괴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들은 앙상하게 파괴되었고 여기저기
포탄에 맞은 자취가 드러나 보였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뒤에 타고 있는 황 비서에게 맥아더 장군에게 수여할 훈장과 훈기를
확인시켰다.
김포비행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탈 차는
맥아더 장군이 마련해준 카키색 세단이라고 노블 박사가 가르쳐 주었다. 눈에 익은 몇몇 특파원과 기자들이 대통령의 서울 복귀를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곁에는 워커 장군, 아몬드 장군, 조이 장군
등이 서있었다.
대통령은 비행기트랩을 내린 다음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
으로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대통령 뒤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나에게
자기 부인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부인은 아주 매력 있는 주부이고, 남편의 지위 때문에
티를 내는 일이 없는 겸손한 아내였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금방 친숙
해졌고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전승국 최고사령관의 부인으로서 늘
검소했으며 사치나 낭비를 죄악으로 생각하는 절제 있고
조용한 내조자였다.
敵치하에서 살아남은 文人들 10월15일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일은 정말 어렵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 줄이라도 좋으니 날마다 간단하게 기록하라고 당부했다. 어제는 김광섭 비서가 연락도 없이 늦게 왔다.
대통령은 그에게 시킬 일이 많이 있어서 아침부터 김 비서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시간을 잘 지켜야만 문화인이라고 누구에게나 가르쳐 왔으며,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 비서는 시인이기 때문에
문인기질이 있어서 자유분방한 면이 있지만, 나와는 달리 대통령은
항상 그를 감싸준다.
김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너그럽지 못한 성미 탓에 나는 부석해진 김 비서의 얼굴과 술 냄새로 “또 술 마시고 늦었구나”하고 바로 직감했다. 대통령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음성으로 늦게 온 이유를 김 비서에게 물어보았다.
김 비서는 납북됐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을 만나 밤새껏 막걸리를 마셨다고 실토했다. 이 말에 화가 풀린 대통령은 “절친한 친구들이 안 끌려가고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으니 반가웠겠구먼. 그래 별다른 소식들은
없었나?”하고 물었다.
김 비서는 많은 문인들이 적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견뎌냈으며, 현재
확인한 바로는 박종화(朴鍾和), 김동리(金東里), 유치진(柳致眞), 방기환(方基煥), 오종식(吳宗植), 양주동(梁柱東) 씨 등이 무사하다고 보고해서
대통령이 무척 기뻐했다.
미군보다 앞서 국군이 평양 입성 10월19일
드디어 자랑스러운 우리 애들이 미군보다 앞서 평양에 입성했다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이 보고해왔다. 대통령이 “됐어, 됐어”하며
저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대통령은 빠른 시일 안에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시민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겠다고 말했다. 오늘은 온통 축제분위기다. 엊저녁부터 계속 타이프를 쳤더니 손끝이 화끈거린다.
저녁에는 무초 대사 축하만찬과 함께 평양입성 축하까지 겹쳐 기쁨에
넘치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도 시종 무초대사와 다정한
모습을 여주었다.
다만 워커 장군이 샐러리와 당근 곁에 있는 조그만 유리그릇에 담아놓은 초고추장을 야채와 함께 찍어먹고 매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마요네즈 소스를 곁들여 놓았는데도 대통령과
무초 대사가 찍어먹는 것을 보고 워커 장군도 토마토케첩으로 알고
먹었는지 저토록 혼나는 모양이다.
평양시민들, 태극기 들고 "이승만 만세" 10월30일
대통령이 평양을 무사히 다녀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반 경무대를 출발하여 8시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평양으로 향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김광섭 비서, 김장흥 총경, 이선근 대령 등이
수행했으며, 공군의 김정렬(金貞烈) 장군이 경호비행을 했다. 동행하지
못한 나는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죄며 기다렸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태극기를 든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트루먼에게 원자탄 사용 검토...영국 수상이 반대 11월28일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전문을 보냈다.「본 사령부는 능력범위 내에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였으나 지금은 그 통제와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음.」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 특별회합을 소집했다. 이 회합에서
애치슨 장관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야할 것” 이라고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기자단과의
주례회견 석상에서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3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원자탄 투하 여부의 결정을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맡겼다”고 한 뒤 “유엔군이 한국 국경을 넘어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 문제는 유엔이 결정할 것이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달려온 영국수상 애틀리와의 회담 뒤에 트루먼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난로 불도 없는 성탄 예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 12월24일
내일이 크리스마스여서 우리는 예배를 보러 오전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는 예배당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너무나 쓸쓸하고 황량하며 난롯불 하나 없이 썰렁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운 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으로 꼽아 약 20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다.
목회를 인도할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 한사람이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신도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교인들이나 대통령은 함께 예배를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였다. 그 신도는 성경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와도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이 예배는 지금껏 우리가 참석해온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기억에
새겨질 만큼 감동적이었다.
조병옥 내무, 유엔군 후퇴 보고 1월1일 오후11시15분
여비서 미시즈 강이 침실 문을 노크하며 조병옥 내무장관이 대통령을
뵙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미 조 박사는 대통령 집무실에 와있었다.
대통령은 급히 옷을 입고 집무실로 내려갔으며,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조 내무는 적군이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우리 측이 후퇴중이라고
보고했다. 경찰은 의정부를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시민들은 이미 미아리를 떠나고 있다고 했다. 조 내무는 대통령에게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 오전 6시에 경무대를 떠나도록 권고했다. 그는 챔프니 대령에게
대통령을 위한 비행기를 준비시키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우리가 먼저 서울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면서, 국방장관과
리지웨이 장군 또는 무초 대사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까지는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서울을 떠나도록 충고해올
것임이 틀림없었다.
"평양의 식량 태우지 마라, 시민에게 나눠주라" 1월3일
오전 9시에 서울비행장 활주로를 이륙할 비행기를 타려면 8시30분에
경무대를 출발해야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시간을 지연시키려고 괜히 이 일 저 일을 하려고 했다.
나는 슬픈 감정을 억제하며 눈물을 감추느라 애쓰면서 비통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통령과 나는 경무대를 떠났다.
우리는 한사람의 비서(황규면 씨)와 양 노인과 고용원 여자 한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그 이외의 직원들은 이미 각자가 가족들을 데리고
기차나 배로 떠나도록 했었다.
그들 대부분은 벌써 1주일 전에 정부의 모든 공무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철수할 때 떠나가도록 조치를 했었다.
평양에서 철수할 때 군대에서 수송해오기 힘든 양식을 소각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모든 쌀과 양식을 한 톨도 태워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대신 양식을 전부 피난하지 못하고 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주도록 지시했다.
유엔,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정 2월2일
유엔총회가 영국과 인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찬성44, 기권9, 반대7표로 중공(중국공산당 정권)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다.
이 결의안에 반대한 나라는 미얀마, 인도, 그리고 소련불록의 다섯 나라를 합하여 모두 7개국이다. 이 결의안은 “중공군대와 국민들의 적대행위를
중지시키고 한국에서 철수하라"는 것이며, "유엔은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군사행동을 계속한다"는 것으로 유엔회원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계속 모든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한다.
오전 10시에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왔다. 무초 대사가 비행장에서
우리를 전송하였다. 2시에 각료회의가 있었으며, 드디어 장면 씨가
총리직을 수락했다.
일본이 항복 서명한 미주리 항모를 타다 2월3일
우리는 낮 12시에 스트러블 해군소장의 점심초대를 받아 부산에서 6마일 밖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 미주리호로 떠났다. 어찌나 풍랑이 일고 파도가 높았던지 미주리호의 상륙발판까지 우리를 태우고 간 모터보트가 앞으로 밀리고 뒤로 밀렸다. 나는 뾰족구두를 신고 뛰어넘다가
넘어지거나 신발을 빠뜨릴까봐 아예 구두를 벗어들고 맨발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스트러블 제독이 우리에게 배를 구경시켜 주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장소로 갔을 때는 감회가 깊었다. 항일독립투쟁에
평생을 바쳐온 대통령을 남달리 존경하는 스트러블 제독은 정성을 다해
우리를 영접해주었다.
이 항공모함은 승무원이 2천3백 명이나 되는 참으로 커다란 배였는데,
승무원들은 예장을 갖추고 일렬로 서 있었다.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했다. 사열식이 끝난 다음 스트러블 제독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은 칸막이는 없었는데,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식탁은 2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완전통일 이외에는 어떤 것도 수락할 수 없다" 2월15일
아군이 적에게 포위당한 채 사흘 동안이나 필사적으로 싸웠던 지평리의 처절한 싸움터에서 공산군들은 마침내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알려왔다.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에게 만주에 대규모 폭격을 가해 북한 북쪽에 있는 적의 후방기지를 섬멸하여 다시는 공산도배들이
힘을 못 쓰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대통령은 “국가를 통일하고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완전히
회복하여, 한반도 안 어디나 분단된 곳이 없도록 한다.”는 전쟁목표를
뚜렷이 밝힌 각서를 장면 국무총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 각서를 워싱턴의 우리 대사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사본을
만들게 해 자신이 급히 쓴 편지와 함께 외교행낭 편으로 보냈다.
이 서한에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완전통일 이외에는 어떤 것도 수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독립운동 중 가장 힘든 고비였던 1941년, 대통령의『일본 내막기』의 원고를 세 차례나 타자했을 때도, 손끝이 부르트고 눈이 짓무른 경험이 있다.
당시 대통령은 나를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으로 데리고 가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위로해 주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엔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시름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끝 구절은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서 넣은 가사다. 이 노래가 떠오를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著 / 조혜자 번역
/ 480페이지 / 값 23, 000원 / 기파랑 관련기사
대한민국은 위대한 아버지를 버렸다
"不正을 왜 해? 내가 그만둬야 사람 안다치지"
'한민족의 모세' 이승만을 부활시키자
이승만도 '이승만 헌법' 지키려 물러났다
몇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불세출의 영웅
왜 한국인은 자기나라 위대한 지도자를 모를까
전쟁중에도 자유선거, 한번도 헌정중단 안했다
'소련 위성국' 막아낸 세계 유일의 인물
"통일 기회 왔다" 오로지 '북진통일' 집념
'운동권 청년' 이승만, 고종을 굴복시키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하나로 뭉치자"
"김일성도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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