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옛 추억(追憶)의 회상(回想)
흙길따라 길게 뻗은 돌담, 봇짐을 머리에 이고 장을 오가는 아낙네들,
뱃속은 허허로웠지만 해지는 줄 모르고 함께 싸다녔던 코흘리개 친구들,
길가에 앉아 맷방석을 짜고 있는 노인의 굽은 등, 댓돌 위에 고무신,
수런수런 이야기 꽃을 피워낸 동네 우물가…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멀리서 아파트가 쳐들어 오고 있었다.
새벽별이 지면 동이 트던 동산도 아파트에 가려졌다.
나는 그날 망부석의 소리 없는 죽음을 보고 잠실 주변이 도시화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골목 풍경 사진작가 김기찬(66)씨가 서울 석촌동, 방이동,
오금동 잠실 주변과 수도권 일대의 ‘잃어버린 풍경’(눈빛출판사)
30년을 사진으로 담았다.
개발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할 무렵인 20~30년 전 서울 강남 주변의 풍경은
정겹고 아름답다. 풍성해서가 아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그 시절의 가난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미덕”(소설가 공선옥)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하나둘씩 세워지면서 황폐해져 가는 강남의 마을들을
사진으로 돌이켜 보는 마음은 무겁다.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 풍경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꿈, 그러나 살아있는 한 열망할 수밖에 없는 꿈”
▲ 주인잃은 망부석(1981년 4월 서울 강동구 고덕동)
▷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하는 아파트…주인잃은 망부석…
결국 봉분의 주인공도 먼 길을 다시 한번 떠났다
▲ ‘ㅇ’자 초가집(1978년 6월 서울 은평구 수색동(화전))
▷ 수색에서 버스를 내려 화전을 지나다 마주친 ‘ㅇ’자 초가집.
어색하게 카메라를 마주하던 할머니와 손녀딸.
머리 위로 뚫린 초가지붕, 하늘, 새…
▲ “모두 이장하세요”(1982년 3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 파헤쳐진 선산,
이장을 앞둔 이 무덤의 후손은 애꿎게 담배만 연신 물었다.
저 멀리 아파트들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 쯧쯧…노파의 마음(1985년 6월 서울 송파구 오금동)
▷ 외로운 섬처럼 올라앉은 마을.
메워진 논두렁에 며느리와 함께 주저앉은 노파는 마실나온 것도 잊은 채
하릴없이 마을만 올려다본다
▲ 잔칫집에 다녀오시나…봇짐 나들이(1982년 3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 은마아파트 앞 밭두렁. 대치동 토박이 아낙네들이 외출했다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 올림픽공원이 들어설 자리(1983년 8월 서울 송파구 오륜동)
▷ 서울에서 성남과 광주를 오가던 버스 길.
88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올림픽 촌을 건설했고,
이 자리는 현재 올림픽파크 호텔이 들어섰다
▲ 저 아파트들엔 누가 살까?(1981년 6월 서울 강동구 둔촌동)
▷ 아이를 하나씩 들처업고 저녁 마실나온 아낙네들.
등에 업힌 아이들은 이제 20대 중반이 되었겠지
▲ 어린 소년의 사색(1981년 7월 서울 송파구 방이동)
▷ 친구들아 어디갔니? 어느새 아스팔트 길이 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떠났다
▲ 돌담길 작은소녀(1982년 6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 돌담마을, 감나무집…돌담길 아래서 배시시 웃던 상고머리 소녀.
30대 중반이 되었을 그녀의 어릴적 집은…
▲ 정씨댁 제삿날(1980년 6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 맷돌에 두부콩을 갈고 앞마당에서 빈대떡을 부쳤다.
꼬마도 “할아버지 드시기 전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 동네우물(1980년 8월 하남시 황산)
▷ 도대체 어떤날일까. 나뭇잎 툭툭 떨어지던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이 부산하다
▲ 어디 다녀오세요?(1981년 1월 하남시 춘궁동(고골))
▷ 정초가 가까운 어느 날, 눈이 소복 내렸다.
시집간 딸네라도 다녀오는지 머리에 보따리를 인
아낙이 동네 어귀로 들어선다
▲ 하교길 무얼 그리 바쁘신가?(1981년 5월 하남시 미사리)
▷ 동네 앞 넓은 샛강, 자갈밭, 귀가하는 소녀들…
산자락은 그대로인데…
우리 자화상(自畵像)
한국 언론 사진 기자들
신탁통치 반대 격문
무엇을 위한 행사인지는 알수 없으나 성조기를 든것으로 보아
축구 선수들
행사장을 경비 하는 미군
남대문과 전차
서울의 홍등가.
영문으로 미군의 출입을 금지하는 팻말이 붇어있고
뒷쪽에 미군 헌병도 보인다.
작고한 배우 김승호의 영화 마부를 생각나게 하는
조랑말이 끄는 마차와 마부
어릴때 기억에 남는것 중의 하나가 인력거다.
서울 어디에서나 볼수 있었든 인력거,
어머님과 함께 타기도 했든 이인력거는 육이오 전쟁 수복후
서울로 돌아오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러
어린나에게 굼금중을 불러 일으겼었다.
보이 스카웃
서울 시내 모습
가정 주부
이들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가족 처럼 보인다.
과일을 팔고 있는 아낙들
경복궁 경회루 지붕에 난 잡초를 보면 눈물이 날정도로 애처롭다.
일제는 조선인들만 고통을 준게 아니고
문화재까자 돌보지 않아 지붕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무슨 이유로 시가 행진을 하는지 알수가 없다.
지붕으로 보아 일본인들이 두고간
부동산인 적산 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그당시 연예인
연예인
창덕궁 비원...
음식을 먹고 있는 두여인
모자
연예인
새로 조직한 국방 경비대
인천에 서있는 증기 기관차
철도 전복 사고 현장
화재가 발생한 서울의 한 건물
일본군대가 남긴 파라슛을 점검해보는 사진작가
시가행진을 구경하는 시민들
동대문 근처로 추정되는 건물과 전차
시내 전차
물깃는 모습
각반을 찬 패잔 일본군 가장과 등짐을 진 그의 자식.
일본군의 무장해재를 하면서 미군이 접수한 군수품중
일본군의 99식 소총은 회수해서 한국국방 경비대가 사용했으나
그외 군수품의 행방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수가 없다.
그궁금증을 풀수있는 사진이 바로 김포비행장에 줄줄이
서있는 일본군 전투기다.
연합군이 Code Name Sonia로 불렀든
이전투기들은 Mitubishi K1-51 Type99 기종이다.
20여대로 보이는 이전투기들은 건국후 들여온 10대의 연습기
진주한 미군은 일본 열도와 한국내에 남은
일본군의 모든 전투기나 탱크와 각종무기는 모조리 잘라내거나
아니면 불도저로 갈아뭉개 고철로 만들어 한대도 남기지 않았다.
이차대전후 나치 독일이 남긴 무기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장비는 미군이 연구용으로 선택된 몇개의 무기는 예외였다.
동대문 밖으로 보이는 사진
열차 사고
삼척에 있는 한 탄관
아편으로 알려진 이마약은 일본이 한국인을 이용하기 위해
아편까지 이용해 한국인을 착취한 이들에게 동일본 대지진때
의연금을 걷고 낸 한국인들,그렇게 36년을 격고도 도와주면
독도문제 들고 나오지 않을것 처럼 믿엇든
좋은 일본 사람은 죽은 일본넘외에 없다는게 나의 믿음이다.
그당시 이런글 썼으면 아마 나를 보고 모진 사람이라고
일본에 또다시 대지진나면 정부에서 조금 도와주고
민간 차원의 모금이나 도움은 절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사진사들과 가깝게 지낸 작가와 한국 사진사들
일본군의 각번을 차고 도끼질하는 이남성은
아마 일본군에 징집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뭇짐 진노인
남산에 세워진 신사 앞에서 있는
미군과 미군의 찝차 모습에서
소녀가 신고있는 게다짝과 신사의 생생한 모습에서
일본이 남긴 잔재가 무엇인지를 읽을 수가 있다.
사진의 신사가 있든 대지는
현재 도서관과 공연장으로 변했다.
이사진에 보이는 남산위 신사와 현동국대 근처에
또다른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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